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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문제의 원칙적 해결이야말로 평화를 지키는 방법

연구위원 한혜인

또다시 드리워지는 일본의 야욕

2023년 2월 9일 일본과 필리핀 정상은 양국이 군 합동훈련 및 기타 작전을 더 강화하고 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방위장비와 기술 이전을 확대, 미국과 3국간 협력 강화를 모색하기로 합의했다(「필리핀에서의 자위대 인도지원․재해구원활동에 관한 TOR). 북한의 납치문제와 미사일 문제를 의제로 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북한 견제라는 의도로 보이지만, 역시 미국과 일본 필리핀 3국 간 협력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중요 포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이 일본을 이용해 동아시아 안보를 주도하려는 의도는 노골적이고, 일본 또한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FOIP)’,‘인도태평양에 관한 및 ASEAN 아웃룩( AOIP)’등 안보전략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확보했다. 이번 두 나라의 정상회담도 그 같은 안보 전략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에 앞서 한국 윤석열 정권은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2022.12.28.)을 발표해 탈중국을 선언했다. 나아가 윤대통령은 일본의 군비 증강에 대해 “그럴만도 하다”고 용인 했다. 안보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과 필리핀의 안보 협의로 필리핀의 루손(Luzon)섬에 자위대가 주둔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 한국 군대도 파병하기를 미국과 일본이 유도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피식민 비극의 섬, 루손

이제 일본의 대중국 안보전략 속에 루손섬이 한발짝 더 다가가게 되었다. 루손섬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령이었다. 1945년 1월 6일부터 일본군과 연합군(미군)이 최대의 전차전을 격렬히 벌였던 곳이다. 일본의 보급체계가 끊겨 병사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증언이 있는 전투이기도 했다. 또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된 이들이 일본군으로 참전하여 희생되었던 전투이기도 했다.

루손섬에는 일본군의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었고,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희생되었다. 크라크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한편,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은 1945년 8월 루손섬 산악지대에서 고립된 상태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 처우와 포로 학대, 살해의 원인 제공 혐의로 필리핀 전범 재판에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4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 수용소에서 사형되었다. 루손섬에는 이처럼 조선인들의 아픔이 남아 있다. 강제 징병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이들의 민족적 자존과 인권은 회복되지 못했고, 그들의 고통스런 기억은 욱일기가 그려져 있는 신사 모양의 기념물 안에 고통스럽게 갇혀 있다.


필리핀 루손섬의 크라크 비행장터에 남아있는 위령비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 부정

최근 일본은 군함도 등 탄광, 광산 시설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강제동원의 역사를 잘라냈다. 유네스코는 완전한 역사를 기술할 것을 권고했지만, 아직 그 권고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나아가 사도 광산을 또 등재하려고 강행하고 있다. 일본은 일본의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연구와 활동으로 축적해온‘강제연행’의 역사를 2021년 4월 각의 결정을 통해 부정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근거한 국민징용령에 의해 ‘징용’된 것이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한 것이기 때문에 ILO에서 정하는 ‘강제노동’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강제연행, 강제노동이라는 용어는 사라졌다. 일본은 당시의 법으로 적법하게 동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피해자들이‘강제로’동원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본 회사 사료들 속에서도 노무담당자가 당시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로 동원했다는 기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은 피식민지민들의 처절한 투쟁의 결과

전후 일본에서는 전쟁책임·전후책임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일본정부는 그들의 최대 피해인 원폭피해 문제는 일본 국가책임을 인정하면서, 국적을 묻지 않는 보상체계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오랫동안 식민지민은 일본의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오랜 싸움 끝에 한국에 거주하는 피폭자들도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민족에 대한 강제동원의 문제에 대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구별했다. 중국인의 강제동원의 문제는 전쟁범죄로 간주될까봐 와무성 스스로 조사하고, 유골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각 기업과 화해를 만들어 갔다.

이런 과정 속에서 조선인은 ‘합법적 동원’이었고, 모집이나 알선 노동자의 경우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온 것이라고 국가책임을 부정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재판에서도 강제동원의 불법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시효, 제척기간의 도과, 그리고 우리에겐 생소한 개념인 국가무답책 즉 국가 권력행사에 의한 개인의 손해에 대해, 국가는 손해배상책임이 없다는 메이지 헌법의 원칙을 내세워 일본제국의 역사인식으로 지속적인 식민지민으로의 인식을 강요당했다. 이런 틀을 깨기 위해 한국의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에 소송을 했고, 2018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사건[대법원 2018. 10. 30. 선고 전원합의체 판결]이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강제동원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 피해에 대해 일본과 한국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해결했다고 하고 있다. 이 논의를 할 때, 대상은 징용노동자와 징병에 국한했고, 그 보상은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에 따른 피해보상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전적 청구권” 즉, 마땅히 받아야 하는 미불금 임금, 저축 등이었다. 인신에 관한 문제는 식민지 지배 그 당시 일본의 원호법과 각 부조규칙에 따른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판결을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김명진 기자 한겨레신문, 2018.10.30

그러나 대법원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의 문제로, 한일청구권협정이 해결한 “금전적 청구권”의 해결과 별개의 문제이다. 미불금 임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 강제동원 피해에 따른 피해보상이라는 해 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공동체는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적이고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에 동의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은 ‘국가’가 만들어낸 법률에 협력하도록 강제당한 것은 불법적 피해라고 사법부의 판단을 통해 얻어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사회적 규범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최종 판단은 우리 공동체의 역사적 규범, 역사인식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이 대법원 판결을 조금이라도 이행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아직도 한국의 역사인식을 제국의 역사인식으로 가두려는, 피해자의 역사인식을 부정하고, 일본제국의 역사인식을 강요하는 또다른 국가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해자 관점, 피식민 관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

우리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문제를 바라볼 때,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2차세계대전 후 과거사 청산과 국가책임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전쟁범죄와 전쟁피해의 문제로만 논의되어 왔다. 일본제국의 전쟁에 동원된 피식민자들의 이중적 입장이 가지는 그 심대한 인격적 인권적 피해는 구조되지 않는 역사의 조난자로 만들어 갔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전쟁을 치루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포로감시원이 되었던 분들은 식민지민이라는 이유로 가해자가 되었고, 중국인과 같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은 식민지민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되지 못했다. 또 일본인(일본호적)이 아닌 조선인(조선호적)이라는 이유로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일본국적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일본 원호법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또한 해방 된 조국은 ‘국민’의 범주를 정하고, 피해를 증명해 내라고 요구했다. 1974년에 있었던 민간청구권배상에서 한국 국적자임과 배상의 증거를 요구했고, 2010년 지원법에서도 자신의 피해를 자신이 증명해내도록 요구했다. 국내동원, 국외동원이라는 비역사적 구분을 통해 끊임없이 피해를 구획하고 누군가를 배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재판이라는 방법을 통해 구체화했고, 그 구체화된 책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게 한 일본 정부의 구조적, 즉 식민지 지배책임이라는 역사 정의를 만들어 갔다는 점, 그리고 그 결론은 일본 정부 뿐 아니라, 한국 정부의 책임도 물었다. 이 결과는 재판을 통할 수 없는 피해자들, 끌려간 아버지의 존재를 한번도 만나지 못한 유족들의 답답한 피해도, 아직 가족을 만나지 못한 유골들이 일본제국의 침략의 범위만큼 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반환되고 있지 않은 상황도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라는 것을 인지하고 해결해가야 할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했다.

일본은 강제동원의 역사를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문제 1938년부터 1945년 안으로 가두고, 당시의 법, 당시의 국가, 당시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설사 당시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때 입은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피해는 그 이후의 삶에 지배적인 요소가 된다. 그들은 그 때 20대였고, 지금은 90대가 된 몸과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이 불리한 역사를 끊어내는 것처럼, 피해자들의 역사는 어느 시점에서 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면, 몸과 기억에 새겨져 있는 현재의 문제이다. 우리 공동체는 우리의 몸과 기억의 문제들을 풀어가면서 공공역사를 공유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심어놓은 역사인식이 아니라, 피해자·피식민자들의 관점에서 쓰는 역사인 것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미쓰비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4년 기자회견에서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12.08.

식민지 지배의 상처, 다시 한번 묻는 국가 책임

한국 정부는 일본에게‘통절한 반성’을 계승할 것을 요구한다고 한다. 담화로 이야기 하자면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발표하는 것으로 일본의 성의있는 태도로 인정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통절한 반성을 한다는 것은 진정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폭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즉 이번 문제에서 적어도 가해 기업의 반성과 사과, 보상금 지불이 없이는 공허한 반성과 사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정부에게 과거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중층적인 구조로 공동체의 명예회복과 공적기억의 형성, 인권규범의 내면화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묻고 싶다. 외교적 관점에서만, 혹은 보상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일본과 기업의 반성과 사과의 시그널 없이 돈 문제에만 몰입하면, 우리 공동체는 역사의 조난자가 되어 흩어져 버릴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세계 어느 공동체보다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대법원 판결로 규범화했을 뿐아니라, 과거의 폭력적 기억을 덮고 망각해 가기보다는 부정의를 바로잡고 공적인 기억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가는 아주 자존감이 강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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